하루를 잘 산다는 건 더 많이 쥐는 일이 아니라, 오늘 내 마음을 어디에 쓸지 정하는 일에 가깝다.

법정스님의 법문을 하나 들었다. 제목은 “어떤 각오로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가”였다. 여러 말이 있었지만, 결국 남는 건 단순했다. 적게 가져도 넉넉할 수 있고, 많이 가져도 마음이 불안하면 가난할 수 있다는 것.

이 말이 괜찮았던 이유는 삶의 기준을 바깥에서 안쪽으로 다시 가져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더 가져야 편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더 많은 돈, 더 좋은 물건, 더 빠른 성취, 더 나은 평가. 그런데 실제로 마음을 흔드는 건 가진 것의 양보다 그것을 대하는 방식일 때가 많다.

남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가져도 부족해진다. 반대로 지금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기 시작하면 많지 않아도 조금은 넉넉해진다. 결국 문제는 소유의 크기보다 마음이 붙잡힌 방향에 있다.

예를 들어 물건 하나를 사는 일도 그렇다. 마음에 든다고 바로 가져야만 하는 건 아니다. 좋은 그림을 봤다고 꼭 내 집에 걸어야 하는 건 아니고, 좋은 물건을 봤다고 꼭 내 이름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바라보고 즐길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순간이 있다.

이 기준은 사람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좋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바로 다가가야만 하는 건 아니고, 어떤 관계가 마음에 걸린다고 해서 당장 내 방식대로 풀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조금 떨어져 바라보고,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사람을 덜 거칠게 만든다.

법문에서 특히 오래 남은 말은 “남을 도우라. 도울 수 없다면 해를 끼치지 말라”는 대목이었다. 큰 선행을 하라는 말보다 훨씬 현실적이었다. 매일 누군가를 크게 돕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내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불필요한 상처가 되지 않게 할 수는 있다.

부드러운 말 한마디도 나눔이 될 수 있다. 반대로 무심한 말 한마디도 해가 될 수 있다. 하루를 잘 산다는 건 거창한 결심보다 이런 작은 방향을 계속 확인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내 시간과 기운을 밝은 쪽에 쓰고 있는지, 어두운 쪽에 쓰고 있는지 보는 것.

그래서 하루를 살아내는 각오는 생각보다 조용하다. 더 많이 얻겠다는 결심보다, 덜 비교하겠다는 결심. 더 빨리 움켜쥐겠다는 마음보다, 지금 있는 것을 조금 더 귀하게 보겠다는 태도. 누군가를 크게 돕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해치지는 않겠다는 마음.

하루는 결국 마음을 어디에 쓰느냐로 남는다. 많이 가진 날보다 덜 흔들린 날이 더 좋은 날일 수 있고, 크게 이룬 날보다 누군가에게 덜 해로웠던 날이 더 나은 날일 수 있다.

그 정도면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오늘 하루를 전부 바꾸지 못해도, 마음을 밝은 쪽으로 조금 돌려놓는 것. 하루를 살아내는 각오는 거기서 시작되는 것 같다.

출처: BTN 명법문 - 어떤 각오로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가?